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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Star

빌 게이츠(Bill gates) - Micro-Soft

by shenminghu456 2022.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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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헨리 빌 게이츠 3세(영어: William Henry "Bill" Gates III, 1955년 10월 28일 ~ )는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이자 기업인이다.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램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하버드 대학교를 자퇴하고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동 창립했다. 그는 당시 프로그래밍 언어인 베이직 해석프로그램과 알테어용 프로그래밍 언어인 알테어 베이직을 개발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근무하면서 게이츠는 2014년 5월까지 회장, 최고경영자, 사장, 최고 소프트웨어 설계자 등의 직책을 맡았다.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마이크로컴퓨터 혁명의 선구자이자 가장 잘 알려진 기업가 중 한 사람이다.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나 자란 게이츠는 1975년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서 어린 시절 친구였던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동 설립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세계 최대의 개인용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가 되었다.게이츠는 2000년 1월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회장 겸 CEO로 회사를 이끌었지만 회장으로 남아 소프트웨어 설계의 최고책임자가 됐다.

 

2006년 6월 게이츠는 자신과 아내 멜린다 게이츠가 2000년에 설립한 개인 자선재단인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전일제로 근무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파트타임직으로 전환하기도 했다.그리고 2014년 2월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직에서 물러나, 새로 임명된 사티아 나델라 최고경영자(CEO)를 지원하기 위한 기술자문위원직을 새로 맡았다.


1987년 이후 그는 포브스 선정 세계 최고 부호 명단에 포함되었다.1995년부터 2017년까지 그는 포브스지 선정에서 4년을 제외하고 모두 세계 최고 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 2017년 10월에는 아마존 창업자 겸 CEO 제프 베조스에게 추월당했다. 2020년 8월 현재 게이츠는 추정 순자산이 1,137억 달러로, 제프 베조스와 일론 머스크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게이츠는 이후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전일제 근무를 그만둔 이후 여러 자선 활동을 추구해 왔다. 그는 세계 최대의 민간 자선단체로 알려진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통해 여러 자선단체와 과학 연구 프로그램에 상당한 액수의 돈을 기부했다.2009년에 게이츠와 워렌 버핏은 더기빙플레지(The Giving Plege)를 설립했는데, 이 서약서를 통해 자신과 다른 억만장자들은 적어도 재산의 절반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서약했다.

 

1. 학력:

레이크사이드 스쿨 (1973년 졸업)
하버드 대학교 응용수학과 (1974년 중퇴)
하버드 대학교 명예 (2007년 법학박사)

 

2. 성장 과정:

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는 1955년 10월 28일에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아버지 윌리엄 H. 게이츠 시니어와 어머니 매리 맥스웰 게이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영국계 미국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이며,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이민자였다. 그의 가정은 상중류층으로, 아버지는 저명한 변호사였으며 어머니는 교사였다고 한다. 또한 외할아버지인 J. W. 맥스웰은 미국 국립은행의 부은행장이었다. 게이츠에게는 누나 크리스티앤(Kristianne)과 리비(Libby)가 있었다. 그는 그의 가문에서 윌리엄 게이츠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네 번째 남자이지만 실제로는 윌리엄 게이츠 3세로 불리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에서 '3세'라는 접미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가 어렸을 때, 그의 부모는 그가 법조계에서 일하게 되기를 바랬다.


그는 13세 때 상류층 사립 학교인 레이크사이드 스쿨에 입학했다. 8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 어머니회는 자선 바자회에서의 수익금을 텔레타이프라이터 단말기와 제네럴 일렉트릭 (GE) 컴퓨터의 사용시간을 구매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게이츠는 이 GE 시스템에서 베이직(BASIC)으로 프로그래밍하는 것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이에 프로그래밍을 더 연습하기 위해 만든 최초의 프로그램으로 사람이 컴퓨터를 상대로 플레이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한 다른 게임인 달 착륙 게임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입력된 코드를 언제나 완벽하게 수행하는 이 기계에 매료되었다. 게이츠가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의 기억에 대해 그는 '그때 그 기계는 나에게 정말 굉장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어머니회의 기부금이 바닥나자, 게이츠와 몇몇 학생들은 DEC의 미니컴퓨터의 사용 시간을 샀다. 이 시스템 중 일부는 PDP-10이라는 것으로 컴퓨터 센터 코퍼레이션(CCC)에서 생산된 것이었는데, 훗날 게이츠를 포함한 네 명의 레이크사이드 스쿨 학생(폴 앨런, 릭 와일랜드, 켄트 에번스)은 이 시스템의 운영 체제가 가진 버그를 이용해 공짜로 컴퓨터를 사용한 것이 발각되어 이 회사로부터 사용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컴퓨터를 1달 동안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응용수학을 전공했으나 재학 중 1975년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당시에 그는 사업이 안 풀리면 학교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빌 게이츠는 컴퓨터의 황제로 불리고 있다.

 

3. 마이크로소프트:

3-1. BASIC:

게이츠는 알테어 8800을 시연한 '포퓰러 일렉트로닉스(Popular Electronics)' 1975년 1월호를 읽고, 마이크로인스트레이팅시스템(MITS)에 연락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플랫폼용 BASIC 인터프리터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현실에서 게이츠와 앨런은 알테어(Altair)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것에 대한 코드를 쓰지 않았다.그들은 단지 MITS의 관심을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은 MITS의 에드 로버츠 사장을 만나 시범을 보이기로 했고, 몇 주 동안 그들은 미니컴퍼터로 작동하는 알테어 에뮬레이터를 개발한 뒤 BASIC 인터프리터를 개발했다. 시험 설명회는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있는 MITS 사무실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MITS와 계약으로 이어졌다. MITS는 앨런을 고용했고 게이츠는 1975년 11월 앨런과 함께 MITS에서 일하기 위해 하버드를 휴학했다. 앨런은 그들의 파트너십을 "마이크로컴퓨터"와 "소프트웨어"의 합성어인 "Micro-Soft"라고 이름 지었고, 그들의 첫 번째 사무실을 앨버커키에 위치했다. 게이츠와 앨런이 고용한 첫 번째 직원은 그들의 고등학교 협력자 Ric Weiland이다.그들은 1년 안에 하이폰을 떨어뜨리고 1976년 11월 26일 뉴멕시코 주 장관에게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라는 상호를 공식적으로 등록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Altair BASIC은 컴퓨터 취미 활동가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게이츠는 시장 이전 복사본이 유출되어 널리 복사되고 배포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1976년 2월, 그는 MITS 뉴스레터에 취미활동가에게 보내는 공개서신(Open Letter to Hobbyists)을 작성했는데, 이 서신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알테어 베이직의 사용자 중 90% 이상이 마이크로소프트에 돈을 지불하지 않았고 이는 전문 개발업자들의 고품질 소프트웨어를 생산, 유통, 유지하도록 하는 동기를 없애고 있다고 주장했다.이 편지는 많은 컴퓨터 취미 생활자들에게 반감을 샀지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정당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믿음을 고수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976년 말 MITS로부터 독립하였고, 다양한 시스템용 프로그래밍 언어 소프트웨어를 계속 개발하였다.회사는 1979년 1월 1일 앨버커키에서 워싱턴 벨뷰로 이전하였다.

게이츠는 회사가 처음 5년 동안 생산한 모든 코드 라인을 개인적으로 검토하고 종종 다시 썼다고 말했다.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그는 관리자 역할로 전환했고, 그 후 임원으로 전환했다.

 

3-2. IBM과 파트너쉽:

당시 컴퓨터 장비의 선도적 공급 업체였던 IBM은 1980년 7월 곧 출시될 개인용 컴퓨터인 IBM PC의 소프트웨어와 관련해 마이크로소프트에 접근했다.IBM은 먼저 마이크로소프트가 BASIC 인터프리터를 쓸 것을 제안했다. IBM의 대표들도 운영체제가 필요하다고 언급했고 게이츠는 이를 널리 사용되는 CP/M 운영체제의 제조업체인 디지털 리서치(DRI)에 의뢰했다. 그러나 IBM와 DRI의 논의는 지지부진했고, 라이선스 계약에는 이르지 못했다. IBM의 대표인 잭 샘스는 게이츠와의 후속 회의에서 라이센싱의 어려움에 대해 언급하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 체제를 제공할 수 있는지 물었다. 몇 주 후, 게이츠와 앨런은 CP/M과 유사한 운영 체제인 86-DOS를 사용하여 시애틀 컴퓨터 제품(SCP)의 팀 패터슨이 PC와 유사한 하드웨어용으로 만들었다고 제안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SCP와 86-DOS의 독점 라이선스 에이전트로 계약을 체결하였고, 이후 정식 소유자가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패터슨을 고용하여 PC[59]용 운영체제를 적응시켰고,이를 일회성 수수료 5만 달러에 IBM에 PC DOS로 납품했다.

그 계약 자체는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상대적으로 적은 수수료를 벌 수 있었으나 그것은 IBM이 그들의 운영체제를 채택함으로써 마이크로소프트가 소기업에서 세계 유수의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게이츠는 다른 개인용 컴퓨터 제조업체들이 IBM의 PC 하드웨어를 복제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운영체제에 관한 저작권을 IBM에 양도하지 않았다.그들은 IBM과 호환되는 PC를 사실상의 표준인 DOS를 실행하면서 그렇게 했다. MS-DOS(IBM 이외의 고객에게 판매되는 DOS 버전)의 판매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업계의 주요 주체가 되었다.언론은 재빨리 마이크로소프트가 IBM PC에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고 확인했다.PC 매거진은 게이츠가 "the man behind the machine?"(기계 뒤에 있는 사람?)이라고 칭했다.

게이츠는 1981년 6월 25일, 워싱턴 주에 회사를 재법인화하며 이사회 의장과 회장으로서 회사를 총괄했으며, 폴 앨런은 부회장과 부의장으로 임명했다. 1983년 초 앨런은 호지킨 림프종 진단을 받고 회사를 떠났고, 마이크로소프트 주식에 대한 논쟁으로 수개월 전에 경색되었던 게이츠와 앨런의 공식적인 사업 파트너십은 사실상 종료했다.10년 후, 게이츠는 앨런과의 관계를 회복했고 두 사람은 함께 그들의 어린 시절 학교인 레이크사이드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했다.게이츠는 2018년 10월 앨런이 사망할 때까지 친구로 남아 있었다.

 

3-3. WINDOWS:

마이크로소프트는 1985년 11월 20일 첫 번째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버전을 출시했다. 이듬해 8월 IBM과 OS/2라는 별도의 운영체제를 개발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IBM은 새 시스템의 첫 번째 버전을 성공적으로 개발했지만 의견 차이가 커져 파트너십이 틀어졌다.

 

3-4. 경영 스타일:

빌 게이츠는 미래학자 이상의 시대적 감각으로 소비자들의 요구를 컴퓨터 산업에 접목시켜왔다. 개인용 컴퓨터(PC)가 컴퓨터 산업을 주도하고 소프트웨어가 도약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본 빌 게이츠의 통찰력이 바로 성공 신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통찰력은 지속적인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얻은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빌 게이츠는 1년에 두 차례 미국 서북부 호숫가에 있는 별장에 은둔하면서 ‘생각주간(Think Week)’을 갖는다. 1주일 동안 가족들 방문도 차단한 채 세계 각국 직원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토대로 성과물을 만들어 왔다. 빌 게이츠는 직원들 누구나 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제도화시켜 의사소통의 장벽을 없앴다. 소비자들과 경영진의 접점에 있는 직원들이 보고서를 통해 저변의 시장흐름을 생동감 있게 전달했음은 물론이다. 철저한 고객관리와 상호 의사소통을 중시하는 빌 게이츠 특유의 경영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4. 마이크로소프트 이후: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전일 업무를 그만둔 이후 자선 사업을 비롯한 프로젝트에 힘쓰고 있다. 게이츠는 2014년 3월 27일자 롤링스톤지에 실렸던 인터뷰에서 다양한 이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 인터뷰에서 게이츠는 기후 변화, 그의 자선 활동, 다양한 기술 회사들과 관련자들, 그리고 미국의 상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혔다. 게이츠는 50년 후를 내다볼 때 가장 두려운 것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향후 50년, 혹은 100년 안에 매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나, 나는 전세계적 유행병, 핵이나 생화학 테러 행위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라고 말했다.게이츠는 또 혁신을 '진보의 진정한 원동력'으로 규정하고 "미국이 지금까지보다 훨씬 나은 오늘을 보내고 있다"고 선언했다.

빌 게이츠는 슈퍼지능의 잠재적인 해악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처음엔 그 기계들은 우리를 위해 많은 일을 할 것이고 그다지 똑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잘 관리한다면 인공지능은 긍정적일 것이다. 그 후 몇 십 년이 지나면 인공지능은 걱정거리가 될 만큼 강력할 것이다. 나는 이것에 대해 일론 머스크와 몇몇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왜 몇몇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게이츠는 2015년 3월 바이두 최고경영자(CEO) 로빈 리와 함께 TED 컨퍼런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닉 보스트롬의 최근 저서인 '초지능' "매우 추천한다"고 밝혔다.2019년 COVID-19로 인해 전세계가 펜데믹 상황에 빠지기 전에 이 회의에서 게이츠는 전세계가 유행병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경고했다.게이츠는 2018년 3월 시애틀의 자택에서 사우디의 개혁적인 왕세자 겸 사실상의 통치자인 모하메드 빈 살만과 만나 사우디 비전 2030에 대한 투자 기회를 논의했다. 2019년 6월 게이츠는 안드로이드에 모바일 운영체제 경쟁에서 진 것이 자신의 가장 큰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그때 안드로이드를 쳐내야 했는데 ... 이런저런 이유로 그러지 못해 아쉽다. 반독점법 위반 소송 때문에 온통 정신이 팔려 모바일 시장에 집중하지 못했다. 윈도 모바일 OS를 더 잘 다듬었거나 안드로이드를 구글보다 먼저 인수했더라면 지금 모바일 시장은 (애플 iOS와 함께) 윈도 모바일이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

2020년 3월 13일 마이크로소프트는 게이츠가 버크셔 해서웨이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이사직을 떠나 기후 변화, 세계 보건 및 개발, 교육 등과 같은 자선 활동에 헌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5. 백신개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이 전 세계로 확산 양상을 보이던 지난 2020년 5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자신의 아내와 함께 설립한 재단을 통해 코로나 19 백신 개발을 위한 연구 자금으로 써 달라는 요청과 함께 한국의 바이오기업에 360만 달러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미 4월 문 대통령과 코로나 19 대응을 위해 전화통화를 나눴던 빌 게이츠 회장은 한국의 코로나 방역과 리더십에 다시 한번 신뢰를 나타냈다. 특히 그는 코로나 백신 개발을 위해 한국정부와 기업 등과 협력을 약속하면서, 국내 바이오 기업인 에스케이(SK) 바이오사이언스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코로나 백신 민간 분야에서 한국이 가장 앞서 있다"면서 "SK 바이오사이언스가 백신 개발에 성공하면 내년 6월께 연간 2억개의 백신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를 통해 세계 각국의 수많은 어려운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6. 벤처 기업 투자:

비욘드미트(Beyond meat) 식물성 고기 제조 대체육 기업
빌게이츠가 투자한 콩고기로 만든 비욘드미트 버거
슈뢰딩거(Schrödinger, Inc) 생명과학, 소재과학 소프트웨어 업체로 제약·바이오텍·소재 연구에 쓰이는 화학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 제작 기업
웨이스트 매니지먼트(Waste Management) 폐기물 처리 업체
캐나다 국립 철도(Canadian National Railway) 1995년에 민영화된 캐니다 국립 철도
브룸(Vroom) 미국 온라인 중고차 판매 스타트업
트위터(Twitter)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기업
월마트(Walmart) 미국의 다국적 유통기업

 

7. 스티브 잡스와의 관계:

"그와 나는 어떤 의미에서 함께 자랐다. 우리는 동갑내기이며 순진하게도 낙관적이었고 커다란 회사를 세웠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제품과 새로운 것에 대한 모든 환상을 모두 이뤄냈다. 그리고 대부분을 라이벌 관계에서 만들어 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서로에게 상대방이 아플 때에도 어떤 존경심을 가지고 소통해 왔다"

"잡스는 천재였고 나는 그를 많이 질투했다"면서 "잡스는 사람들에게 뭔가 엄청난 동기를 부여하는 대단한 마법사였다면 나는 소소한 마법사였다"

 

8. 워런 버핏과의 관계:

“난 내 친구들을 대부분 언제 처음 만났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워런 버핏만은 예외다. 그의 만남이 나와 아내 멀린다의 삶을 완전히 바꿨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5년 전 오늘이다. 1991년 7월5일.”

 

9. 업적:

1971년 정보 과학사 급여 산출 프로그램 개발
1972년 트래프 오 데이터('교통자료 포착'이라는 뜻)설립
1974년 베이직 개발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 설립
1975년 ~ 2000년 마이크로소프트 CEO
1980년 MS-DOS 개발
1981년 마이크로소프트 주식회사로 전환
1985년 윈도우 1.0 개발
1986년 31세의 나이로 억만장자가 됨
1987년 윈도우 2.0 개발
1990년 3월 윈도우 3.0 개발
1994년 1월 멜린다 게이츠와 결혼
1995년 윈도우 95 개발, 인터넷 익스플로러 1.0 개발, MSN 컴퓨터 통신시장 진출, 워렌 버핏 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한 부자
1996년 인터넷 익스플로러 3.0 개발
1998년 윈도우 98 개발
2000년 ~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기술고문
2000년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설립
2007년 윈도우 비스타 개발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직 은퇴
2015년 클린 에너지 기금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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